평갈다 시즌4 / / 2020. 3. 15. 20:28

제 5장 평화 협정에 대하여: 선으로 된 시간 이미지

나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가?

 

코로나19로 평갈다 모임은 줌(zoom)으로 진행되었다. 각자 편안한 장소로 랜선으로 독서모임은 처음이었다. 자칫 놓칠 수 있는 모임이 온라인을 통해 이뤄져서 좋았다.

 

5장은 평화 협정에 대하여: 선으로 된 시간 이미지에 관한 내용이다. 다가오는 내용들을 정리한다.

 

사회 갈등 분야에서 한 해안은 공포이며 그 반대쪽 해안은 사랑이다. … 우리의 관계를 규정할 물이 어느 쪽으로 흐를 것인가? 공포의 기슭인가 아니면 사랑의 기슭인가?” p97

 

존 폴레더락은 협상을 통한 평화는 질량화 할 수 있지만, 변화의 실질적 본성이 아니다.” 라고 표현했다. 갈등은 그 정도에 따라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신호승 선생님의 말씀처럼 갈등은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게 아니라, 사랑과 공포가 공존한다. 협상이 시작되면, 갈등의 종결을 기대한다. 종이 한 장에 소소한 약속부터 거대담론까지 적는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시작이지 종결이 아니다. 우리가 이루고 싶은 평화는 무엇이며, 어떤 평화를 이루기 위해 모였는지 쉬지 않고 대화가 필요하다. 각자가 이루고 싶은 평화는 다를 것이다. 평화는 내 이익을 이루기 위해서, 상대의 이익을 빼앗기 위해서 수단이 될 수 있다. 평화는 수단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함께 모을 수 있는 공론화된 플랫폼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레더락에 질문을 다시 생각한다. 물이 어느 쪽으로 흐르기를 바라는가? 나는 공포냐 사랑이냐의 간극에서 공포 쪽에 있어도 내 자신이 사랑 안에 있으면 되지 않을까? 사랑 쪽에 있더라도 내 자신이 공포로 위장된다면 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닐 것이다. 물이 흐르기를 바라기 전에 나는 서퍼이고 싶다. 서퍼는 파도가 오기를 기다리며 그 파도를 타고 앞으로 전진하며 그 상황을 즐긴다. 물이 어느 쪽에 있던지 내 역할은 서퍼가 되어 앞으로 또는 그 파도를 충분히 즐기고 싶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물에서 파도를 즐기고 싶을까? 나는 깨끗한 파다에서 파도를 즐기고 싶지, 쓰레기가 가득한 바다에서 파도를 즐기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 내 역할은 서퍼로 파도를 충분히 즐기고, 바다를 깨끗하게 유지 시키는 것이다. 결국 문화를 형성하는 일이다. 평화의 문화가 지금 당장 시작되지 않는다 말할 수도 있다. 이상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는 사막에 나무를 심는 같이 보이기도 한다. 나무는 사막이라고 할지라도 물을 계속 주는 사람이 있다면 자랄 것이다. 콩나무 시루처럼 평화의 진영이 좁아보기긴 하다. 사막에서 나무는 홀로 자라날 수 없다. 물을 주는 사람이 있어야 자라난다. 물을 주는 사람은 나무가 언제 자라나 그늘을 줄까 싶을 주도 있다. 그러나 나무는 어느샌가 자라나 누군가에게 그늘을 줄 것이다. 내 역할은 지금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평화의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게 아닐까? 파도를 즐기고 그 파도를 일으키는 바닷가를 깨끗하게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평화 협정은 갈등의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다.

평화활동가는 멈추지 않는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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